그것은 그대로 그 자리에, 그리고 다른 자리에. - 김의선의 작업에 대하여
(2020)
/ 이민선 (작가)
김의선의 작업에 대해 써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까닭은 그의 작품들이 나의 그것들과 다른 공간을 지향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난 학기 다른 수업에서 나의 전반적인 작품에 관해 발표한 적이 있다. 그때 기억에 남는 말이 있었다.
“어딘가 다른 곳에 정신 팔려 있는 사람에게 적나라한 현실을 손에 들고 ‘이것 좀 보라’고 하는 것 같아요.” -김여경
공감이 가는 말이었다. 나는 작업에서 항상, 죽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자에게 ‘인간은 모두 죽는다’고, 요즘 들어 우울하다는 자에게 ‘호르몬 때문이다’라 말한다. 차가워 보일 수도 있는 이런 말들은 사실 내가 건넬 수 있는 확실한 위로이며, 확신할 게 거의 없는 오늘날, 억지 공감보다 진심일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나는 현실에서 일어나 작업으로 드러난 문제들을 현실을 바탕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김의선은 나처럼, 현실에서 일어난 일에서부터 작업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나와는 다르게, 작업에서 대상이 처한 현실의 굴레를 벗어던져 주려 한다. 김의선이 발견하는 것들은 그대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이지만, 그가 그것들을 다른 자리로 옮기면서 그것들에 내재한 성질은 변화된다. 지금부터는 그는 무엇을 보고, 어떻게 그것을 옮기며, 그것은 어떻게 바뀌게 되는지 조금 더 심도 있게 다루어보도록 하겠다.
벽돌, 나무 조각, 나뭇 가지, 자갈, 깃털, 플라스틱, 빵, 잡초, 이끼, 그리고...
보통날, 보통의 기분으로 보통 지나다니는 길을 걷다가 그는 발견한다. 보통은 벽돌, 보통은 나무 조각, 보통은 잡초, 보통은 자갈 같은 그런 것들이다. 그런 것들은 그가 공부하던 프랑스에서나 한국에서나 내가 살던 독일에서나 어디에나 아주 많이 있다. 그러나 김의선은 벽돌이 벽돌의 자리에 안착되어 있는, 이를테면 건물의 일부분인 상태로 붙어 있는 상태에는 무심하다. 그는 벽돌이 건물에서 떨어져 나와 인도 한복판에 쌓여있는 상태, 심지어 그 위에 맥주병이 하나 얹혀 있는 상태에 관심이 있다. 다시 말해 오브제가 오브제의 기능을 충실히 이행하지 않는 상태에 그는 관심을 가진다. 이런 상태의 오브제를 발견했을 때, 그는 이런 곳에 놓이기까지의 ‘숨겨진 이야기’를 생각해보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길을 걷다가 그런 상태의 오브제를 포착하고는 사진으로 기록하는데 사진에 드러난 장면만으로는 오브제의 숨겨진 모든 이야기를 추적하거나 단언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 때문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는 섣불리 오브제의 이야기를 완성하기보다는 오브제의 보다 많은 숨겨진 이야기를 숨겨진 채로 수집하는 것에 집중한다.
김의선은 이러한 행위를 자신에게만 한정 짓지 않는다. 그는 구인 광고, 혹은 실종 반려동물을 찾을 때 쓰이는 전단지를 제작하여 이렇게 적어두었다. ‘사람들에게 오브제를 찾고 관찰하고 수집하길 제안합니다. 이미지로 수집된 오브제를 @observe_object로 보내주시면 같이 공유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인스타그램의 @observe_object라는 계정에 들어가 그가 업로드한 사진을 하나씩 보게 되었는데 그가 직접 촬영한 것들, 그리고 타인이 보내준 것들이 섞여 500개에 이르는 사진들이 이어졌다. 촬영된 사진에 등장하는 오브제를 발견한 순간마다 그는 평소와는 다른 느낌을 느꼈음이 분명한데, 그것을 타인에게도 권하여 체험하게 하고 싶었던 듯하다.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라는 불분명한 단어로 그의 체험을 설명하는 것이 아쉽다. 그러나 규명할 수 없는,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것이 그의 사고에 영향을 끼쳤음을 부인할 수 없으며 김의선 역시 당시에는 그런 영향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함께 하자’는 제안으로 입장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오브제의 자리에서 떨어져 나간 오브제를 발견한 김의선은 그것을 전시의 공간으로 옮긴다. 그런데 옮겨진 오브제로 하여금 그가 받은 ‘평소와는 다른 느낌’을 그는 어떻게 표현하는가?
수집하기, 관찰하기, 관계 맺기, 시간 들이기, 스며들기, 떠다니기, 기록하기, 그리고…
김의선은 오브제를 수집하고, 그것들의 관계를 재설정하여 배치한 <관계 탐구>(2018)를 보여주며 ‘오브제들이 예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오브제의 자리에 있지 않은 오브제’를 발견한 그가 발견된 오브제를 전시 공간으로 옮기면서 오브제가 속해있던 특수한 상황은 사라졌으며, 전시 공간의 특성상 어떤 특수한 상황을 연출하더라도 전혀 생경하지 않았기에, 그는 당황했을 것이다. 나는 그에게 오브제들이 예상대로 움직이지 않은 것이 그에게 긍정적인 쪽인지 부정적인 쪽인지를 물었는데, 그는 ‘긍정적인 편이며, 오히려 그것이 자연스럽고, 경이롭다고 생각되었다’고 말했다. 덧붙여, 그는 이 작업의 한계를 실감하며 ‘어떻게 볼 것인가?’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러한 행위는 앞서 서술한, 오브제가 특정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던 숨겨진 이야기에 더 이상 개입하지 않기로 했던 작가의 행위와 그 결을 함께한다. 김의선은 그가 경이롭다고 생각했던 오브제에 그 자신이 최소한으로 개입하길 바라며,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기로 결정한다.
이 즈음해서, 나는 김의선이 작품 소개의 서두에 했던 ‘어떻게 하면 대상을 잘 볼 수 있을까?’라는 질문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는다. 그는 대상을 잘 보기 위해서는 대상과 본인이 수평적인 관계여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때문에, 오브제와 김의선 사이의 위계를 제거, 혹은 축소시키기 위해서 그에게는 몇 가지의 행위가 필요했다. 그 행위들을 제목으로 한 작업들로는 <시간 들이기>(2018), <스며들기>(2019), <떠다니기>(2019)가 있다. 이 작업들은 김의선이 오브제와 또 다른 오브제를 결합하거나 함께 배치하는 과정에서 그 사이의 불화, 혹은 어색함을 제목과 동명의 행위들을 투입함으로써 완화시키고, 극복하게 한다. 더 나아가, 그는 <가닥과 껍질>(2019)이라는 영상 작업에서, 또 <고정된 흩날림>(2019)이라는 설치 작업에서 오브제의 특이한 움직임을 그 자체로 보여주려 하는데 전자에서는 거미줄에 걸린 껍질의 움직임 자체를 영상으로 기록하여 간접적으로 보여주었고, 후자에서는 누군가가 잠시 스치기만 해도 움직이며 떨리는, 나뭇가지 위의 섬유질의 움직임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었다.
작가의 개입은 더 축소되어 <아카이브 1-3>(2017-2018)에 이른다. 이 작업은 김의선의 모든 작업의 시작처럼, 길가의 돌덩이를 발견하면서 시작된다. 그는 그 돌덩이를 매일 촬영하고 그 날의 날짜, 시각, 온도, 날씨, 달의 형태, 일출, 일몰 시각까지 세세하게 기록한다. 2017년 1월부터 2018년 5월까지 1년이 넘게 기록된 이 아카이브는 날마다 바뀌는 돌덩이의 위치, 그리고 그 주변 환경의 변화를 사진으로 담는다. 흥미로운 점은, 이 작업에서도 촬영한 날의 상태 외에 돌덩이의 방향이 어떻게 바뀌었다던가, 주변의 오토바이가 달라졌다던가 하는, 발견한 것에 관한 작가의 개입은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 작업에서 김의선은 그저 그것을 보는 사람이다. 돌덩이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그의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김의선에게 그것은 돌덩이의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카이브 1-3>(2017-2018)의 기록물이 그에게 적합한 방향을 제시해주는 작업 방식이라고 느껴졌는데 그 이유는 이 작업이 포착한 돌덩이가 작업에 직접 등장하지 않고, 이미지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오브제가 간접적으로 등장함으로써 나는 그가 발견한 오브제를 (나의 방식으로) 직접 보는 것이 아니라 김의선이 오브제를 관찰하는 행위를 엿보는 듯했다. 그리고 그가 오브제를 관찰하는 것 자체를 드러내는 것만이 작가의 개입을 최소화하며 오브제를 발견된 상태로 보존할 수 있는, 어찌 보면 김의선이 바라던 바를 실현시킬 수 있는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나처럼 이러한 방식의 적합성을 어렴풋이 느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더 나아가, 다음 작업 <당신의 우주를 위하여 POUR VOTRE UNIVERS>(2019)에서 그가 발견한 대상의 이미지조차 모조리 지워버린다.
그것은 그대로 그 자리에, 그리고 다른 자리에
아마도 첫 소설일 <당신의 우주를 위하여 POUR VOTRE UNIVERS>(2019)에 대해 설명하며, 김의선은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우주’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 우주란 한 사람의 지각 영역의 최소치 또는 인지 과정이 일어나는 최소의 공간이다. 이러한 영역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충돌하지만 항상 존재해왔던 것이고, 그 운동이 자연스럽기에 종종 간과되곤 한다. 그는 이 소설을 위해 소설가를 직업으로 삼은 주인공을 내세워 그의 소설을 위한 캐릭터를 창조한다. 이 캐릭터들은 제각각 다른 존재로 그려지는데, 소설가가 이들을 사람으로 인식하는 순간, 그들은 그에게서 분리되어 자유로워진다. 즉, 이 소설은 자유로운 캐릭터들로 인해 그들 스스로를 설명할 수 있는 장이 된다. 소설가는 이 개별 캐릭터들을 이어 줄 배경을 만들고, 그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이로써 캐릭터들은 서로 알아보고 반응하며 움직인다. 때문에 그들이 스스로 운동을 시작한 이상, 소설가는 그들에 개입하여 그들의 운동을 통제할 수 없다. 김의선은 이 소설을 위해 캐릭터들을 ‘있는 그대로’ 볼 준비를 갖추어야 하며 소설의 주인공, 즉, 소설가로서 캐릭터들의 운동에 따라 발생하는 상황을 그저 묘사할 뿐이다. ‘그러므로 소설은 그들이 남기는 것 또는 그들이 만나는 것에 대한 접근’이라고 그는 말한다.
김의선은 ‘이때껏 발견했던 오브제들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이 소설 작업을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본인 뜻대로 움직이게 하려고’라는 의도가 더 걸맞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는 또다시 ‘그래서 그들 스스로 움직이게 하려고’ 소설 쓰기를 택한다. 앞서 그가 오브제를 발견하고 갖게 되는 ‘평소와는 다른 느낌’에 대해 서술했었다. 그 느낌에 관해 김의선은 오랜 시간 고민한 것 같다. 그리고 그가 소설을 쓰기로 결정했을 때, 혹은 소설을 쓰면서, 그 느낌은 비로소 구체화된 듯하다.
“흔히 한 가지에 집중하면 주변이 보이지 않거나 다른 잡생각이 들지 않는 경험을 다들 해봤을 것이다. 오로지 집중 받는 대상과 집중하는 나만 남겨지는 순간 말이다. 대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등 대상을 하나부터 열까지 뜯어보며 곱씹는다. 이렇게 시간을 들여 잘 보려고 하면 당장 내 눈에 들어오려는 존재만 남는다. 이렇게 하나의 존재가 남았을 때, 이 존재를 시작으로 나에게로 뻗는 선을 생각해본다. 이것은 나와 적당한 거리를 갖고 있으며 이 거리는 내가 계속 관찰할 수 있게 도와준다. 모든 행동에는 시간이 따르기 때문에 내가 관찰을 하면 할수록 시간이 켜켜이 쌓여 또 다른 선을 만들어 낸다. 이 선들을 이으면 삼차원 공간을 만들어진다. 이 일련의 과정을 거치고 나면 내가 바라보았던 대상이 자유롭게 떠돌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 (이렇게 생겨난 공간에 존재들을 널브러트리면 꽤 재미난 풍경이 펼쳐진다)”
시간을 들여 오브제를 관찰하며 그가 받았던 느낌은 그 자신이 서술하듯이, 새로운 공간을 생성한다. 게다가 김의선은 ‘언제나 만들어 낼 수 있는 공간—가상공간’을 그리는데 이 또한 오브제를 관찰하면서 획득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가 생성하고자 하는 공간은 현실과는 유리된 것으로, ‘마음속 한구석에 (현실로부터) 도망치거나 쉴 공간을 항상 만들어 두려고 한다’ 고 그는 말한다.
나는 김의선이 경험한 것을 소설로 표현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반가웠는데 그 이유는 그가 발견한 오브제(소설에서는 캐릭터)가 그대로 그 자리에 있으면서 동시에 새로운 공간(책)으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관계 탐구>(2018)를 비롯한 당시의 작품들에서와 같이, 그가 발견된 오브제를 전시 공간으로 옮겼을 때 그 오브제는 그의 자리에서 떠날 수밖에 없었으므로, 이것은 중대한 변화이다. <아카이브 1-3>(2017-2018)의 경우에도 오브제는 그것이 발견되었던 자리와 그의 기록물에 동시에 존재한다. 그러나 긴 시간의 관찰 기간 동안 ‘발견의 순간’이 갖던 신선함은 퇴색되고 만다. 물론 이 작업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른 오브제의 변화 과정을 기록하겠다는 것이 김의선의 의도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글에 비추어 보았을 때, 오브제의 관찰에 따른 새로운 공간의 생성이 가능해지는 조건은 오브제가 그의 주어진 환경과 반응하고 있다는 것을 가정해야 가능해지는 것으로 보인다. ‘대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시간을 들여 잘 보려면 오브제 자체, 혹은 주변 환경의 급격한 변화는 그의 관찰 행위에 간섭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당신의 우주를 위하여 POUR VOTRE UNIVERS>(2019)에서 김의선이 그리는 우주는 제목 그대로, 그들의(오브제, 즉, 캐릭터의) 우주이다. 김의선은 그가 발견하고 찾은 그들의 우주를 사진으로 찍어 간직하곤 했었는데, 이 작업에서는 그것들을 언어로 만들어 빈 종이에 적는다. 나는 잠시 김의선이 되어 그의 글쓰기 과정을 생각해본다. 순간적인 포착이 중요한 사진에 비해 글을 적는 시간은 길다. 캐릭터의 운동을 지켜보며 그것을 묘사할 때, 그는 대상을 발견했을 때의 경험과 사유, 또는 기억을 꼼꼼하게 되짚을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사진은 ‘보는 이’를 필요로 하고 글은 ‘읽는 이’를 필요로 한다. 김의선은 그의 글을 전달하기 위해 자신의 글을 읽고 또 읽으며 수정해야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캐릭터를 대하는 경험은 일순간에 그칠 수 없게 된다. 글을 읽는다는 것은 흰 종이에 쓰인 검은 글씨를 하나하나 해독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이해를 위해 여백과 검은 잉크로 시선을 옮기며 내용을 곱씹게 된다. 이는 우리의 방식으로 캐릭터를 본 것보다 김의선이 그것을 어떻게 보았는지 있는 그대로 체험하는 행위와 가까울 것이다. 김의선의 글을 따라가면서 우리는 그것(오브제, 캐릭터)은 그대로 그 자리에 있음을 뚜렷이 확인할 수 있음은 물론, 어느새 독자로서 그것(오브제, 캐릭터)이 우리의 우주 속에 파고들어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지금까지 김의선의 작업을 돌이켜보며 그가 발견한 것, 그가 그것을 잘 보려 하는 행위, 그가 그것을 그대로 두면서 동시에 생성하려는 공간에 대해 서술했다. 감상자로서, 김의선이 또 어떤 새로운 시도를 보여줄까 기대가 되는데 오히려 그런 기대가 더 잘 보기 위해 애쓰고, 다시 잘 보기 위해 대상을 돌이켜서 또 보는 그의 태도를 훼손시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는 최근 <가닥과 껍질>(2019), <고정된 흩날림>(2019)과 같은 이전 작업에서 보여주기도 했던 오브제의 움직임을 극대화한 작품, <은근한 엉킴>(2020) 시리즈를 작업했다고 말했다. 이 작업에서 그는 접착제조차 사용하지 않고 자연물을 엮거나 얹는 방식을 시도했다고 하며 이 작품 근처에 손을 오므린 채로 있으면 손의 열기만으로도 작품이 떨린다고 이야기했다. 아무래도 그에게는 아직 더 관찰해야 할 시간이 필요한 듯하다. 더 나아가, 그는 이런 본인의 실천이 주변인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 본인의 경험, 실천, 반복, 행위가 사람들로 하여금 @observe_object라는 하나의 계정을 함께 만들 수 있도록 했던 것은, 그가 발견한 우주의 일부분을 타인들도 함께 보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내가 김의선의 작업에 대해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던 시점으로 돌아가 본다. 나는 작업에서, 사람들에게 현실을 현실로 해결하라고 말한다. 김의선은 우선 현실의 어려움에서 눈을 돌리고 무언가를 집중해서 보라고 말한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현실과는 다른 공간이 생길 수 있다고 그는 사람들을 독려한다. 김의선은 명상 같기도, 여행 같기도 한 그의 관찰에 대해, 사실 이렇게 생성된 가상공간 또한 현실과 완벽히 분리될 수는 없다고 고백한다. 물론 우리가 그의 가상공간을 그와 똑같이 체험했을지라도 다시 부딪히게 되는 것은 차디찬 현실일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여행에서 다녀오면 어딘가 달라져 있는 우리를 발견하지 않던가. 김의선은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스며드는 그러한 변화를 믿는다. 때문에 그는 다시 부지런히 관찰하고, 부지런히 경험을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