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다른 곳으로
(미지의 순간들, 술술센터, 2023.6.23.~7.8.)

/ 안다혜 (작가)

  이른 아침의 선착장. 아직은 차가운 푸른빛의 공기를 맞으며 배에 올라탔습니다. 출항 이후 끊임없이 진동하는 선채는 유선형으로 이어진 바닷길을 따라가며 하얀 물보라를 만듭니다. 은은한 어지럼증과 날카로운 바닷바람이 계속됩니다. 복합적 감각에 정신이 혼미해진 채로 우리는 낯선 이름의 섬에 도착했습니다. 맑은 풍경에 다시 눈앞이 선명해집니다.

우리는 처음 가보는 장소에서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아름다움을 동시에 감각합니다. 이곳에서 무엇을 바라볼지, 어디를 향해 걸어갈지, 어디에 앉아 휴식할지, 무엇으로 허기를 달랠지, 모든 것을 새로 결정합니다. 익숙한 일상과 전혀 다른 시공간에서 우리는 그동안 사용하지 않고 있던 낯선 감각을 깨웁니다.





  미지를 만난 세 사람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낯섦을 감내한다.

  미지를 만나기 전 나1는 어린 시절에 배운 세상의 규칙과 질서들을 의심하며 익숙한 동네의 골목길을 방황하고 있었다. 골목은 언뜻 복잡해 보여도 딛을 수 있는 길과 막다른 길이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다. 나는 막혀있는 담벼락을 통과해 걷는 상상을 한다. 9와 ¾ 승강장처럼 다른 세계로 통하는 입구를 발견하고자 나는 미지로 갔다. 미지는 나에게 길이 존재하지 않는 복잡한 땅을 보여주었고, 나는 그 땅을 유심히 바라보았다.2

  의선3은 미지를 산책했다. 무작정 나서서 발길 닿는 대로 멀리 나아간다. 그는 목적 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움직이는 것을 산책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이 선명한 한낮에 시작한 산책은 저녁까지 이어진다. 의선의 발길은 미지에 비정형의 궤적을 남긴다. 미지는 의선에게 마른 잎과 나뭇가지, 돌 등 자신의 일부분을 내주었다.4

  승연5은 미지와 유령을 만났다. 유령과 조우하는 순간 물속을 걷는 것처럼 시간이 팽창되었다. 평소와 같지 않은 낯선 감각으로 승연은 유령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었다. 유령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거기 있다고 느껴졌다. 승연은 보이지 않는 그를 찬찬한 손길로 쓸어 모아 담았다. 돌처럼 무거운 유령의 그림자를 더듬으며 그를 찾았다.6





  세 사람은 여전히 미지를 모르지만, 미지 안에서 생겨난 그들의 움직임과 사유가 서로 얽혀 이곳에 또 하나의 낯선 풍경을 구성합니다. 낯선 땅, 낯선 존재, 낯선 균형이 겹쳐진 여기 고요한 풍경 안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길을 잃어도 괜찮습니다.


1 안다혜(b.1992)는 텍스트와 이미지를 혼용한 시각예술을 매개로 정상성이 만든 폐쇄적인 시공간에서 개인이 경험하는 부조리를 탐구하고 있다. 정상성이 지배한 시공간의 부조리, 혐오, 불안을 적극적으로 감각하고 탈 정상성의 생활을 시도하며 경험주의에 기반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폐가》(2015, 캔 파운데이션 오래된 집), 《가족 생태 언어》(2020, 소쇼), 《혼자 지운 서사》(2022, 공간:일리) 세 번의 개인전을 진행하였고, 《투명한 집》(2022, Keep in Touch), 《Fluid Floor》(2022, 볼록) 등 기획 전시에 참여했다.

2 안다혜, 길 잃은 풍경, 78.8x109.1cm, 종이에 과슈, 콘테, 2023

3 김의선(b.1997)은 설치를 기반으로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작업한다. 인천 바닷가에서 나고 자라 프랑스 니스에서도 늘 바다와 함께였다. 그래서인지 자유로운 공간을 만드는 데에 관심이 있다. 특히 인지 과정에 생기는 공간감에 대해 탐구하며 관계성에 집중한다. 식물, 바람, 물과 같은 자연과 유기적인 방법으로 물질적 경험을 재현하고 관객의 지각이 새로운 환경에 노출되도록 이끈다. 최근 활동으로 단체전 《Response-Ability》(2023, SomoS)과 2인전 《Fundamental Fig》(2022, 공간 파도)에 참여했다.

4 김의선, 가벼운 궤적, 14x21x10cm, 혼합재료, 2023

5 이승연(b.1994)은 장소에 남아있는 기억을 수집한다. 우리는 직접적인 교감을 나누지 못해도 주위를 기울이면 유령의 존재를 목격할 수 있다. 낯섬은 응시를 이끌어 내며 응시하는 동안은 시간의 팽창이 일어난다. 팽창한 시간 속에서 평소와 같지 않은 낯선 감각으로 유령의 존재를 짐작해 흩어져 사라지는 것들에 형태를 부여하고, 그 장소에 남아있는 기억을 읽고 죽음을 이해해 가는 과정을 기록한다. 《절반의 진실》(2022, 갤러리인), 《Negative Platform》(2022, 중간지점) 등 기획 전시에 참여했다.

6 이승연, 유령들, 가변크기, 지점토, 모래, 흙, 흑연가루 2023